저는 사진 전공이지만 조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진을 찍은 결과물들이 지역에 있는 사물들이나 물건, 그리고 공간에 대한 느낌들을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형적인, 즉 사연이 많이 들어가 있고, 첨가되고, 관계되어있는, 그런 내용이 풍부한 사물로 많이 느껴진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사진의 장르에서 나와서 조각에 대해서 접근이 더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는 조각은 일반적인 조각 보다는 탑이나 안테나 같은 인공물 쪽에 가까운데요, 뉴욕 맨해튼의 고층 빌딩으로부터 신과 소통을 위해 지었던 바벨탑을 떠올리는 등, 인간의 상상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듯한 인상들을 동물적 감각으로 느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요셉 보이스라고 하는 작가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직립과 소통의 조형언어를 바탕으로 대상을 보고 느끼는 방식을 접하고 익혔던 것 같습니다.
귀국 후 여러가지 활동을 하다가 우연히 접한 권진규의 작품들을 보면서 마찬가지의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원의 얼굴>이 지닌 길쭉한 형상의 경우, 고양미를 주기 위해 조형을 완전히 끌어올린 것이거든요. 둥근 하단부에서 시작해 올라가 동그랗게 끝나는 형태로부터 인도, 티베트 등지의 탑과 스투파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거치며 권진규 선생님 뒤에 ‘선생님, 뒤에 잠깐 있어도 될까요’하고 말없이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유일하게 지원해서 들어간 레지던시가 권진규 아틀리에입니다.
권진규 선생님과 아틀리에
권진규 아틀리에는 기억을 기념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념하고 기억하는 행위는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전유물이기도 하고요. 훌륭했던 권진규 선생님의 후배가 되는 것 자체 만으로도 레지던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진규 선생님이 작업실도 직접 지으신 거고, 정릉에 있던 동생분 신혼집에 만들어 준 게이트도 있잖아요. 굉장히 따뜻하고 포근하고, 치열했던 느낌의 공간이었습니다. 작품활동을 한다기 보다도, 그저 멍을 때리고 있어도 되게 이상한 기분이 들거든요. 선생님이 아틀리에에서 작업 하셨을 당시의 동선동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전차가 다니는 등 여러가지 것들을 찾아보게 되었고 그 경험을 계기로 하여 서울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권진규 선생님과 아틀리에는, 자꾸 무언가를 퍼주는데 보려고 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으신 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권진규 아틀리에에 있으면서 한국 조각사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권진규 선생님의 생존 당시, 식민지 시기부터 해방 이후 등에 대해 파편적인 키워드로는 조금 알고 있었는데 그걸 조금 더 본격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연구였습니다.
당시의 서구화라는 사회적인 움직임과 이에 따라 여러가지 전통을 다 파괴하는 무력적인 문화에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상태에서 권진규 선생님은 비 제도권·제도화를 통해 더욱 묵묵하게 다른 수사를 고수하였던 덕분에, 오늘날 남아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작업 할 수 있었습니다.
테라코타는 출처가 땅이잖아요, 그런 부분도 너무 좋았습니다. 재료의 출처는 땅인데, 내용의 출처는 땅과 인간, 땅과 하늘과 관계하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에 대해서요. 저는 많은 글을 탐독하면서 학습하면서도, 아틀리에에서 그런 감각적인 느낌을 통해 보다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권진규 아틀리에 오픈 스튜디오
저는 이전부터 만들고 싶어했던 ‘역기’를 만들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역기에 오렌지를 놨는데, 마치 오렌지에 전선과 전구를 연결하면 빛을 발하는 것처럼 오렌지에는 힘, 에너지에 대한 상징이 있는 것 같아요. ‘힘, 에너지’라는 주제에 ‘먹는 것’. ‘자기 단련’, ‘심신단련’ 등의 개념을 병렬시키고, 이것들을 뒤에 놓인 신혼집 게이트와 엮으면서 일종의 제단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 생전에 하셨던 마네킹 등 무대 작업과 연관지어 평면의 달들을 마당 처마에 매달아 그곳을 무대화 시키는 작업들을 주로 하였습니다.
수행하는 공간
작업은 대부분 수공으로 많이 하고 있습니다. 수공에 집착을 많이 하게 된 배경은 개념적인 측면에 있습니다. 조각 · 미술이라는 단어는 외래어인 한편, 원래 우리 전통 상에서는 그것들이 전부 연장, 사물로 통칭되었습니다. 수공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죠. 손으로 들고, 방울로 흔들고, 부채질하고, 요리하고, 밭을 매고, 사람들하고 악수하고 위로하는, 그런 손의 회복에 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연장이라는 단어의 의미에는 툴(Tool)도 있지만, 손의 연장(延長)입니다. 그래서 수공이라는 개념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 조각을 하다 보면 재료를 만지면서 풀어 가는 경우도 많고요.
오늘날에는 물성을 다루는 순수 조각과, 미디어·영화같은 비물질 문화의 경계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작가들이 많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 근대 예술가들 그 중에서 권진규 선생님의 정신을 잇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창의적으로 생각해서 생산해내는, ‘생산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작가이지만, 권진규 선생님은 그 범위가 굉장히 넓었던 분인 것 같습니다. 그 정신적인 끈이 아주 어린 후배들의 입장에서는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것이죠.
작가의 주업이 생산자이기는 하지만, 생산과 동시에 ‘수행’을 하게 됩니다. 생산이라는 쳇바퀴를 과하게 돌다 보면, ‘수행’이라는 한 축에 공백이 생길 수 있잖아요. 저는 권진규 아틀리에에서 작가가 큰 작업을 하거나 뛰어난 영감을 바탕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잠시 정지하고, 나의 상상의 출처를 한번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권진규 아틀리에는 교회와 절간 같이 명상하거나 누군가의 자취를 남기고 기념하는, 무덤과 같은 존경의 성격이 강한 공간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아틀리에를 수행하는 공간, 작가의 사고하는 속도감을 잠시 향상시킬 수 있는, 즉 손의 속도에서 생각의 속도로 향상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권진규 아틀리에를 거쳐 사회로 나올 때, 아틀리에를 통해 고양된 살찐 상상력을 바탕으로, 사회에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힘으로, 추진력으로 다시금 창작활동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거기는 가능한 그 모습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죠.
카오스모스(CHAOSMOS)
2022년 개인전의 제목이 ‘카오스모스(CHAOSMOS)’, ‘카오스’라는 것과 ‘코스모스’. 즉 ‘혼돈’과 ‘질서’라는 뜻입니다. 전통이라는 뭔가 끊어짐의 상태, 즉 우리랑 전혀 다른 남의 얘기처럼 되어 버린 상태와, 홀로 현대 공간에 던져져 버린 우리의 모습들. 이 관계가 결국 카오스와 코스모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다보면 같은 시대에서 바로 전에 존재하셨던 권진규 선생님의 작품 또한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분이 내면에서 겪어야 했던 카오스와 코스모스, 한 시대를 살면서 거쳐온 해방 이후의 절대적인 질서의 시간들. 즉, 크로노스의 시간들과, 그분이 선택해야 했고 정말 창의적으로 바꿔야 되는, 이해를 위해서 만들었던, 카이로스적인 시간들의 결합체를 우리가 이번에 보게 되는 거잖아요. 그처럼 카오스모스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권진규 선생님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분은 지금 돌아가셨고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정신의 주파수를 권진규 선생님하고 조금 연결해야지 결국 전통은 그렇게 흘러가게 된다는 개념인 거죠. (전통이) 우리가 현실을 지혜롭게 살기 위한 그런 하나의 정신적인 툴(Tool)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전히 흐르고 있는 이런 카오스 안의 코스모스 그러니까 혼돈 안의 질서, 질서가 품고 있는 혼돈, 그것을 계속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기회의 시간으로 써야 되는 카이로스적인 시간들을 어떻게 담아내야 할 것이냐는 고민 속에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 맥락에서 권진규 선생님과 정신적인 줄을 연결하고자 합니다.
작가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내면이 어디 하고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해주는, 그것이 새로움이라고 봅니다. ‘와, 새 거다’가 아니라 ‘어?’ 하고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 중요한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새로움은 그렇게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요즘에 저를 비롯하여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한국의 정체성,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들여오시는 작가분들이 많아지더라고요. 주로 택하시는 부분들이 어떤 전통 문화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라든지 사물, 특징적인 모양새를 많이 취하시는데, 안타깝게도 대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과 더 거리를 멀게 만들고, 오히려 이미 박제된 것을 더 박제시키게 만든 상태입니다.
새로움이라는 것에 대한 경로를 다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 역시 그런 위기에 빠질 수 있는데, 우리가 그동안 서구에서 배워왔던 보여주는 물질성하고는 우리 내면의 물질은 좀 다른 형태로 되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알아차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그 것을 알아차렸을 때, 우리가 권진규 선생님의 작품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 작가도 생산자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남들이 못 보는 것들을 더욱 우리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권진규 선생님의 말씀 중에, “손은 손이 아니고, 승려는 승려가 아니고,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죠. 이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